만원(滿願)

다자이 오사무(太宰 治) (1938)

 이것은 지금부터 4년 전의 이야기이다. 내가 이즈(伊豆)지방 미시마(三島)에 사는 친구 집 2층에서 한 여름을 지내며 ‘로마네스크’라는 소설을 쓰고 있을 무렵이었다. 어느 날 밤, 술에 취해 자전거를 타고 거리를 달리다가 부상을 입었다. 오른발 복사뼈 쪽이 까졌다. 상처가 심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술을 마셨기에 출혈이 많아, 서둘러 병원으로 달려 들어갔다. 동네 의사는 서른두 살로, 몸집이 크고 뚱뚱하여 사이고 타카모리(西鄕隆盛)를 닮았었다. 매우 취해 있었다. 나와 비슷할 정도로 비틀비틀 취한 모습으로 진료실에 나타났기에 나는 매우 웃겼다. 진찰을 받으며 나는 피식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자 의사도 피식피식 웃기 시작하여, 결국 서로 참지 못해 마주보며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그날 밤부터 우리는 사이가 좋아졌다. 의사는 문학보다 철학을 좋아했다. 나도 그쪽 이야기가 훨씬 속편했으며 대화는 풍성해져갔다. 의사가 가진 세계관은 원시이원론(原始二元論)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세상만사 모든 것을 선과 악과의 대결로 보고 있었으며 논리 또한 매우 명료했다. 내가 ‘사랑’이라는 단일신(單一神)을 신봉하려고 내심 노력하고 있었으나, 그래도 의사가 말하는 선과 악에 관한 이론을 듣고 있노라면 답답했던 가슴이 확 트이는 것처럼 시원해지는 것만 같았다. 예컨대 간밤에 내가 방문했을 때, 곧바로 부인에게 맥주를 명하는 의사 자신은 선이며, 오늘 밤은 맥주가 아니라 브릿지(트럼프 게임의 일종)를 하자고 웃으며 제안하는 부인이야말로 악이라고 주장하는 의사의 논증에 대해 나도 솔직한 심정으로 찬성했다. 사모님은 몸집이 작고 얼굴은 통통했으며 하얀 피부를 가진 품위 있는 분이었다. 아이는 없었으나, 사모님 동생으로서 누마즈(沼津)에 있는 상업학교에 다니는 얌전한 소년이 혼자 이층에 살고 있었다.

 의사 집에서는 다섯 종류나 되는 신문을 구독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것을 읽기 위해 거의 매일 아침 산책 도중에 들러, 30분에서 1시간 정도 방문하곤 했었다. 뒷문으로 돌아가 툇마루에 앉아 사모님이 가져다주는 차가운 보리차를 마시며, 불어오는 바람으로 펄럭이는 신문을 한 손으로 꼭 잡고 읽곤 하는데, 툇마루에서 얼마 되지 않는 곳에 푸른 초원 사이를 많은 양의 물이 개울을 천천히 흘러가, 그 개울을 따라 좁은 길을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우유배달원 청년이 매일 아침 정확히 “안녕히 주무셨어요.” 하고 나그네인 내게 인사했다. 그 시간 약을 가지러 오는 한 젊은 여인이 있었다. 간이복(簡易服)에 샌들 차림으로, 청순해 보이는 사람이었으며, 자주 의사와 진료실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는데, 가끔 의사가 현관까지 혼자 배웅을 나가며,

 “사모님, 조금만 참으시면 됩니다.” 면서 큰 소리로 주의를 주는 일이 있다.

 의사 사모님이 어느 날 내게 그 연유를 설명해주었다. 그녀는 초등학교 선생님 부인이며, 선생님은 3년 전에 폐질환을 앓게 되었는데, 최근 들어 눈에 띄게 회복세가 좋아졌다. 의사는 치료에 전념하였으며, 그 젊은 부인한테는 지금이 중요한 시기라며 단단히 금지시켰다. 부인은 그 말을 지켰다. 그래도 가끔 어딘지 모르게 측은해 보이는 모습으로 찾아올 때가 있다. 의사는 그 때마다 애써 엄격하게 “사모님, 조금만 참으시면 됩니다.” 하고 암묵적인 뜻을 내포하며 질타한다고 했다.

 8월도 끝나갈 무렵, 나는 아름다운 것을 보았다. 아침에 의사 집 툇마루에서 신문을 읽고 있자, 곁에 앉아 있던 사모님이,

 “저기, 좋아하는 모습 좀 봐요.” 하고 작은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문득 고개를 들자 바로 눈앞 좁은 길을 간이복 차림을 한 청순한 여인이 사뿐사뿐 날아가듯 걸어가고 있었다. 하얀 양산이 빙글빙글 돈다.

 “오늘 아침, 허락하셨어요.” 사모님은 다시 속삭인다.

 3년……이라고 말하기는 쉬우나, 가슴이 벅차올랐다. 세월이 지날수록, 내게는 그 여성의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것은 의사 사모님이 시켰는지도 모른다.